54세 프로그래머

벌써 1년 반 전의 일인데, 작년 여름 모 제품 중 한 프로그램 분석 컴포넌트를 개발하는 팀에서 3개월 인턴을 했다. 이 팀에서 실제 핵심 코드는 단 두 명이 만든다. (아키텍트 한 분은 따로 있고 GUI는 러시아에서 개발함) 그런데 이 두 명의 개발자는 모두 50대이다. 더 나가 내가 일했던 사무실의 규모는 작아서 한 100명 미만이 있는데, 거기에는 50대 개발자가 적지 않았다. 인턴을 하면서 좋은 알고리즘을 배운 것도 큰 소득이었지만 그 외 보고 느낀 것이 참 많았다.

나의 멘토 분은 53세였다. 뉴질랜드에서 대학교까지 나오고 호주에서 대학원을 마친 후 26세에 미국으로 건너와 그 당시 잘 나가던 컴퓨터 회사 DEC에 입사하였다. 처음 한 일이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Ada 컴파일러를 만드는 일이었다고 한다. 종이 테이프와 커다란 스위치를 켜서 부팅 시키는 그런 컴퓨터에서 코딩을 했다고 한다. Ada 레퍼런스를 보여주면서 이 구문 하나하나 마다 테스트 케이스 수천 개를 만들어서 돌렸다고.

그런데, DEC은 80년대에는 잘 나갔지만 90년대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컴팩, HP에 차례로 인수가 되고 마지막으로 인텔이 인수하면서 회사는 문을 닫았다. 보통 회사가 인수 합병 되면 대량 해고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DEC이 인텔까지 인수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의 해고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오버헤드 인력은 구조조정이 있었을 것이다. 머리가 희끗한 그 아저씨들은 거의 다 DEC에서 일했던 분들인데 지금까지 인텔에서 컴파일러/런타임 관련 일을 하고 있다. 비슷하게 DEC에서 알파 칩을 만들던 엔지니어도 대부분 인텔에 남아있다.

엔지니어의 수명이 짧다라는, 특히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수명이 짧다라는 내가 가졌던 한국에서의 인식이 깨졌다. 물론 인턴 면접 같은 것을 가서 18년간 일하고 있는 개발자 분도 보아서 아주 놀랄 것은 없지만, 50대 개발자가 여전히 현업에서 직접 코드를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소프트웨어 산업이 늦게 시작했으니 50대는 지금 없겠지만)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미국 소프트웨어 업체의 그 젊은 분위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크 주커버거나 래리 페이지는 미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스타이다. 그런데 그들이 만드는 웹 서비스는 결국 탄탄한 운영체제/DB/컴파일러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한 분야에서만 20년 넘게 일한 엔지니어가 있어서이다. 그 분들이 하시는 일이 요즘 같이 인기 있는 개발 주기가 빠른 웹 서비스 같은 일은 결코 아니다. 거기 아저씨들도 그런 일은 젊은 애들이 하고, 이런 재미 없는 일은 우리 같은 늙은이가 하는 거지 그러신다.

 

==========

 

아이폰 발 충격파로 침체에 빠진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여기서 우리나락 이렇게 해야한다~ 라는 훈수를 둘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뭐라 하고 싶은 말은 나도 많으나 올리지 않고 그냥 짤방 하나 넣고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그냥 아쉬워서 좀 잡소리 몇 개 더..;;

90년대말 서울대 컴공과 정원은 180명. 여기에 전산학과가 그 때는 따로 있었고 40-50명이 있었으니 200명이 넘었다. 지금은 40명 수준이 되었다. 카이스트 역시 그 당시 전산학과에 200여명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취학 연령 인구가 줄었다고 하지만 위 그림은 현재 우리나라 소프트웨어의 암울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상위층부터 전산학과를 외면하니 상위권-중위권 학생들까지 연쇄적으로 “저기는 가면 안 되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한마디로 막장이 되었다는 소리.

최상위층을 위한 롤모델이야 주커버거 같은 친구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현실적인 롤모델이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절실하다. 바로 내가 작년에 뵈었던 50대 개발자 아저씨들이다. 그 50대 개발자 분들이 포르쉐를 모는 것이 아니다. 매우 평균적인 미국 중산층 아저씨들이다. 지금 우리 소프트웨어 업계가 보여줘야 할 것은 그냥 이런 평균적인 롤모델이다. “주커버거처럼 대박 칠 수 있어요”가 아니라 그냥 개발자 하더라도 평균적으로 살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것이 시급하고 더욱 중요하다.

제대로 된 소프트웨어 산업 기반이 부족하니 근무 환경이 열악해지고 그걸 보고 누가 똑똑한 친구들이 가겠는가. 다시 이는 고급 인력의 부족을 겪고 소프트웨어 산업 기반의 취약으로 연결된다. 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지.

 

4줄 요약:

  1. 안철수 아저씨는 롤모델로 어떤가요? 아, 훌륭하시죠. 근데 제가 안철수로부터 배우는 교훈은 딱 하나입니다.
  2. “아, 역시 의사를 해야 하는 구나...”
  3. 저도 우리 아들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4. 아니 그 보다 아들이 아빠를 보고 “나도 컴퓨터 할래”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 합니다.
by 김민장 | 2011/10/28 18:02 | 컴퓨터 | 트랙백 | 덧글(27)
트랙백 주소 : http://minjang.egloos.com/tb/2866435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RuBisCO at 2011/10/28 18:29
인텔과는 반대로 예전부터 일하던 핵심 인력들을 다 잘라버린 AMD는 계속 죽을 쑤는걸 반복하고 있죠 ㅡ0ㅡ;;
Commented by 코난도일 at 2011/10/28 18:45
매우 공감합니다.
Commented by 박PD at 2011/10/28 19:10
제 주위에는 40대 개발자가 꽤 있습니다. 한국개발자도 늙어가고 있습니다. ㅎㅎ
Commented by Ya펭귄 at 2011/10/28 21:04
한국도 한 10년 더 있으면 50대가 꽤 늘 듯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0년 후면 프로그래머의 급격한 노령화 문제가 터질 듯도 싶더라는.....
Commented by 프로채터 at 2011/10/28 19:11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의사를 해야하는군요...
Commented by 해색주 at 2011/10/28 20:15
그래도 개발자들의 창의적인 모습이 부럽기는 합니다.
Commented by 아데니아 at 2011/10/28 20:17
먼저 집안이 좋아야합니다 ㅎㅎ ㅎㅎ. ㅠㅠ
Commented by Ya펭귄 at 2011/10/28 20:25
승리의 기계과...

Commented by James님 at 2011/10/28 23:20
전문직이 진리입니다.

공대 전공 살리고 싶으면 교수님 변시 기시를 목표로 정진해야 합니다.
Commented by 몽몽이 at 2011/10/29 00:17
솔까 해외에선 쪽도 못 쓰는 안철수는 방방 뜨지만 삼성전자 사장은 국회의원도 못 하는 나라죠.
역시 의사를 해야 하는 거였군요.
Commented by d at 2011/10/29 09:48
삼성전자 사장이 국회의원까지 해야겠냐?
Commented by BigTrain at 2011/10/29 10:37
삼전 사장이 국회의원은 못했는데 정통부 장관은 꽤 오래 지켰었지요.
Commented by ㅇㅇ at 2011/11/16 20:26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고 하면 일단 정치가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있으니 이런 나라가 되는듯.

정치 욕을 하면 뭐하나, 머릿속에 상전 이미지가 박혀있는데.
Commented at 2011/10/29 01:3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igTrain at 2011/10/29 10:42
해당 직종과 관련은 없고, 그냥 XT부터 PC를 써 온 유저 입장에서 안철수씨를 바라보면 뭐랄까..

V3, V3RES 돌리던 도스용 시절엔 그럭저럭 경쟁력있는 프로그램이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V3 자체가 경쟁력을 상실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한때는 국산백신 드립치다가 만인의 까임 대상이 되기도 했고. 요즘은 좀 달라진 모양입니다만.. 결국 그의 리즈시절은 개인자격으로 프로그램 개발하던 10여년 전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 그 이후 그의 실적을 찾아보면 글쎄~ 싶죠. 리즈시절엔 그가 의사라는 사실을 아무도 신경 안 썼었고.

저도 90년대 중반 중딩 시절에 컴공, 전산 관련 직종을 진지하게 생각해봤었는데 주변에 PC 다루는 친구들이 워낙 많아서 접어버렸던 기억이..
Commented by Ya펭귄 at 2011/10/29 14:10
컴퓨터 관련 직종이 가지는 심리적인 함정 중 하나가 처음에 그걸 접하게 되면 혼자서도 뭔가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엄청난 걸 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지요....

....

뭐 극소수는 (타 산업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었지만......

Commented by Lohengrin at 2011/10/29 12:59
저는 인도개발자들이랑 일하는데 이유가 한국에는 숙련된 소프트웨어 인력이 부족한데다가 임금이 인도나 중국의 2배이기 때문에 이런 추세는 계속해서 진행되서 미국처럼 아키텍트만 한국에서 하는 향태가 될거라고도 하더군요
Commented by 시쉐도우 at 2011/10/30 15:49
안철수 원장님 같으신 분은 어지간한건 뭘 해도 잘 하셨을 것 같은걸요. 게다가 의대 나오셨다는 것이 당장 메리트로 작용하시진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만 지금에 와서 사물을 바라보시는 걸 보면 의대에서 배우셨던 게 적잖이 바탕이 되시긴 하는 것 같지만요. 학부를 어느쪽 전공으로 나왔냐에 따라서 추후의 시각이 조금씩 다른 거야 다들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사춘기때 독서하는 것 만큼이나 지식를 흡수하고 자신의 지혜를 슬슬 구축해갈 무렵이라서 그런건지.....)
Commented by 안드로메다 토끼 at 2011/10/30 20:30
참 좋은 글인데 댓글이 어쩌다 보니 엉뚱한 데로 빠지는 감이 있네요.

사실 한국도 은행 등을 중심으로 메인프레임을 겪던 세대가 분명 존재했는데, 대학 교수가 된 분을 제외하면 어디로 사라지셨는지 모르겠네요. 앞으로 50대 개발자가 드물지 않게 나오리라 생각은 하는데 매니저와 테크니컬 리드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경력 관리 체계라 어찌될 런지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김민장 at 2011/11/04 02:23
젊은 인력 유입이 없고 기존 인력의 고령화만 이루어지면 일본의 조선산업이 몰락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망하게 될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WinNie at 2011/11/02 21:12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글 내용 중에 약간 사실관계에 대한 해석이 저와 의견이 다른 부분이 있어서 답글 남깁니다.
KAIST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서울대 컴공의 경우에는 학생수 가 줄어든 것이 "학생들의 외면" 이라는 원인에서 야기되었다기 보다는 그저 행정적인 결정으로 학생인원수 자체를 줄인 것 같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롤모델이 부족하다 라는 점은 깊게 공감합니다!
Commented by 김민장 at 2011/11/04 02:22
2000년이었던가요, 컴공+전산이 통합되기 전에 200명이 넘던 학생 수가 50여명으로 준 것은 단순히 행정적인 결정 이외의 요인도 컸지 않았을까요. 물론 5천명이었던 정원이 3500명으로 줄었지만, 최근의 50여명 수준은 심각한 전산/컴퓨터 기피 현상으로 봐야겠죠.
Commented by flying at 2011/11/04 08:39
좋을 글 잘 봤습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의 SW 시장이 그나마 버틴 것은
10 여년 전쯤의 IT 붐 때, 우수한 인력들이 시장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분들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뒤를 이을만한 이들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가 더욱 문제라는 것이지요.
Commented by 지구곰 at 2011/11/07 13:12
개발밥 오년도 안 먹은... 개발자라기보다는 아직 코더라고 불려야 마땅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개발자가 고령화되고 같이 나이를 먹어간다고 해도 국내에서 '순수' 개발자로 늙어가긴 쉽지 않은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하다보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관리, 영업으로 빠질 수 밖에 없는 구조라서 말이죠.
죽을때까지 개발하다 죽고 싶어도 주위 환경이 받쳐주질 못하니... 벌써부터 걱정이고 벌써부터 아쉽습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silverbottlep at 2011/11/10 21:41
정말 멋진 분들이네요. 사실상, 인텔 같은 기업을 지탱하는 것은 바로 이런분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얼마전 국내 굴지의 통신회사와 같이 일한 적이 있었는데, 박사급의 유능한 인재들을 모셔다가 프로젝트 관리만 시킨다고 하더군요. IT 연구 부서인데 말이죠. 그리고 연구개발은 대부분 하청을 맡긴다고 하더라구요.

이런 사회적인 구조도 50세의 구루 개발자를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한몫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컴퓨터 공학은 실제 감각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어떤 문서보다 한줄의 코드가 많은 것을 설명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사회를 비판하고 남탓만 하기보다도 우리가 스스로 각성하고 스스로 변화 시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렇게 변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번 블로그 눈팅만 하다가 느끼는 바가 많아서 글 남깁니다~:)
Commented by 전자 at 2011/11/15 22:08
하드웨어 엔지니어들은 언제쯤 봄이 찾아올까요?

암울하다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 조차도 하드웨어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부러울 따름이죠.
Commented by 박상욱 at 2012/01/18 09:33
저도 아들 돌잔치때 돌잡이 키보드 집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눈팅만 하다가 글이 좋아서 페이스북으로 퍼갑니다^^
http://facebook.com/morn4u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by 김민장 2008 이글루스 TOP 100
최근 등록된 덧글
개발자 입장에서의 수많은 ..
by Jiyoon at 02/04
저도 아들 돌잔치때 돌잡이 ..
by 박상욱 at 01/18
미국 대학원 원서 작성중에 p..
by 태클사이야 at 01/13
TO: 박PD 로그인 하지 않아..
by 박응용 at 01/10
http://gigglehd.com/zbx..
by dhunter at 12/28
우와.. 좋네요. 태반이 ..
by 윤광배 at 12/17
항상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
by y2k at 11/23
글이 좋아서 제 블로그에 담..
by 쏭섭 at 11/23
최근 등록된 트랙백
조엘 스폴스키의 강연 (Sta..
by 인덕원칸타타
[Redis] sds.c를 분..
by 조급하지말고 천천히
메뉴릿
이글루 파인더

website counter

Add to Google

rss

skin by 이글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