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표준어’라는 정의를 보고 좀 황당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정의하는 ‘표준어’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표준어(大韓民國標準語)는 대한민국에서 표준으로 쓰이는 한국어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대한민국 남동쪽 지역에서 초중고를 보낸 나는 ‘표준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 교양이 없어서 일단 자격이 안되기는 하지만 ㅋㅋ 나는 서울말을 사용 하지 않고 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준어의 정의에서 ‘현대’와 ‘교양’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양이라는 것이 반드시 높은 학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니 별 다른 차별적 요소도 없다. 그런데 ‘서울’과 같이 특정 지역을 명확하게 규정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요즘 영어 발음 과외를 조금 받고 있다. 사실 이거 배워도 택도 없다. 절대 미국 사람 발음을 못 따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개인 과외를 받아서 적어도 발음의 차이를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heap과 hip은 우리 귀로는 잘 구분이 안되지만 (전부다 ‘힙’으로 쓰기 때문에) 영어 원어민은 이걸 구분한다. 이번에 영어 발음 수업 배우면서 이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_-; 저 두 모음은 혀의 위치가 좀 미세하긴 하지만 분명 다르다. 이걸 배운 뒤 뉴스를 유심히 들으니 정말로 저 두 발음이 다르다. 그래서 sh*t과 sheet의 차이, “해변의 태양”과 “암캐의 아들”의 발음도 잘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가 이상한데로.. 언제 시간이 되면 이 오묘한 영어 발음을 몇 개 소개할 수도…

 

암튼 그래서 이 발음 가르쳐주는 아줌마에게 물어봤다. 영어에도 도대체 ‘표준어’라는 개념이 있냐고. 혹시 뉴욕이나 뭐 워싱턴 DC에서 쓰는 말이 표준어냐고.

영어에서 standard라는 개념은 없어요.

오히려 내가 “Standard Korean”의 개념에 서울이라는 것이 들어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고 하니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미국 티비나 라디오에서 아나운서들이 쓰는 언어를 보통 표준적이라고 말은 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특정 지역의 사투리를 표준으로 정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미국 아나운서들은 보통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잘 알 수 없도록 최대한 액센트가 없도록 말한다. 이게 표준이라면 표준이라고 말했다. 전국 방송을 타는 네트웍은 그러하지만, 그래도 지역 방송에는 상당수가 액센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심심해서 위키에서 각국의 표준 언어표준 영어에 대해 좀 찾아봤다.

There are no official rules for "Standard English".

일단 영어 발음 선생님의 말씀대로 공식적인 표준 영어는 없다. 표준 독일어는 특정 지역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 표준 프랑스어도 비록 파리의 언어가 우세하지만 기본 정의에 지역을 포함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처럼 수도권에서 쓰이는 언어를 표준으로 정하는 나라도 있다. 일본이 일단 그러하다. 그런데 이 정의가 메이지 유신 시절이라 지금도 그러한지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처럼 아예 딱 ‘도쿄’라는 말이 분명히 있는지 궁금하다.

국가 생성 자체가 완전히 다른 미국이나 민족의 이동이 잦은 유럽 국가와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특정 지역의 언어가 ‘표준’이라고 명문화한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 신문을 보는데 어떤 사람이 그린 신대한민국전도라고 한다. 굳이 우리나라의 기형적인 수도권 집중 현상은 따로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 그림을 보니 표준어 조차에서도 경기도도 아니고 인천도 없고 수원도 없고 의정부도 없고 딱 꼬집어 ‘서울’말로 정의하는 것도 참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두줄 요약:

  1. 아무리 현실적으로 표준 한국어가 서울말이라 하더라도 그걸 굳이 명문화 할 필요는 없다.
  2. 짜장면을 표준어로 제정하자.

 

p.s. 미쉘 오바마가 쓰는 억양이 흑인 억양이냐고 물으니 그건 흑인 억양이라기 보다는 시카고 지역의 사투리라고 한다. 굳이 흑인, 백인 가릴 것 없이 쓰는 억양이라고 한다. 미국도 남쪽 액센트는 특별히 강한 편(흑인들의 그 억양이 다 Southern Accent)이어서 아나운서나 배우 하려는 사람은 액센트가 없는 영어 발음을 배우려고 한다.

by object | 2009/06/07 16:31 | 나머지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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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즈데드 at 2009/06/07 16:52
그러고보니 미국은 '국어'가 없죠?
명목상의 표준언어가 English이긴 한데, 요즘 몇몇 서비스나 웹사이트들 보면 United States - Spanish 같은 식으로 스페인어를 제공하는 공간도 있더군요. (iTunes가 대표적)
Commented by object at 2009/06/07 16:56
네, 미국은 official language가 없습니다. 저도 이걸 미국와서 알았어요. 굉장히 놀랐죠. De facto는 있지만 명문화된 공식 언어는 없습니다. 작년 한창 민주당 당내 경선이 있을 때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이 모여서 토론회를 했었는데, 사회자가 "영어가 오피셜 랭귀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라는 질문에 딱 한 사람만 빼고 모든 후보가 반대를 표했습니다. 오바마/클린턴/에드워드 모두 다 아니오라고.
Commented by 수아기 at 2009/06/07 17:07
지금 쓰는 말을 돌이켜보게 하는 글이네요. 서울이라는 한 지역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는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실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분들 대부분이 지방에서 올라온 분들일텐데 말입니다.
미국에 국어가 영어가 아니라니 놀라운데요.^^
Commented by object at 2009/06/07 18:13
영어가 미국의 '사실상' 국어이지만 명문화하지 않았죠.
Commented by BigTrain at 2009/06/07 17:54
며칠 전에 국립국어원 들어갔다가 제주어 이야기가 있길래 한 번 읽어봤더니... 저도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말 아니면 알지를 못하겠더라구요. 돌아가면 다시 실력이 늘어나려나... ㅡㅜ
Commented by object at 2009/06/07 18:14
제주도는 좀 특수한 상황이니.. 아마 일본도 저 멀리 섬지역은 언어가 많이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Commented by 카구츠치 at 2009/06/07 17:56
표준어의 정의는 한글학회에서 정한 것 아니었나요? 당시 표준어를 정하는 과정에서 생긴 심한 의견대립을, 명문의 규정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소이라고 봅니다만....
미국에서 영어가 표준어로 규정되지 않는 건 다민족국가라는 특성 때문이겠지요. 특히 정치인들 같은 경우에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Hispanic 세력권을 무시할 수 없을테니...
Commented by object at 2009/06/07 18:09
대한민국 표준어(大韓民國標準語)는 대한민국에서 표준으로 쓰이는 한국어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1]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국립국어원이 관리하고 있다. 표준어는 입말로써의 한국어에 대한 규정이고 한국어를 글로 적는 경우의 한글 맞춤법[2] 규정과는 별도의 규정이다. 현 규정은 1988년 1월 9일 문교부고시 제88-2호로 고시되었다.

국립국어원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히스패닉은 이미 엄청난 세력입니다. 미국은 사실 상 스패니쉬와 공용어 국가라고 해도 됩니다. Sotomayor가 괜히 대법관에 추천된 것이 아니죠. 최초의 여성 히스패닉 대법관이 될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BigTrain at 2009/06/07 18:16
맥도날드 알바를 뛸 때 보니 사용하는 약품들이나 기계에 영어 & 스페인어로 사용설명이 다 병기가 돼 있더군요. 미국이 영어만 쓰는 나라가 아니라는 게 확 다가왔었습니다. ㅎㅎ
Commented by object at 2009/06/07 18:18
대부분 기업 고객 서비스 센터에 전화하면 스패니쉬 메뉴가 따로 있습니다. CNN은 Espanol 채널이 따로 있습니다. 관공서에도 당연히.. 스패니쉬 언어로된 문서들이 잔뜩있습니다.
Commented by JOHN_DOE at 2009/06/07 19:10
캐나다 선생님이 자기네 동네에선 The 와 The, a 와 an 의 구분을 안한다고 그러더군요 -_
Commented by object at 2009/06/08 10:12
아예 관사를 구분 안 하는 동네는 없을까요.. 명확하게 The/A/An을 써야하는 경우는 압니다만 그래도 종종 the를 써야하는지 안 써야하는지 헷갈릴 때가 너무 많음..
Commented by 세리자와 at 2009/06/07 20:34
Commented by dw at 2009/06/08 09:40
제가 미국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미국 방송은 중부 발음을 한다고 하던데... 중부 지방의 발음에 액센트가 없는건가요?
Commented by object at 2009/06/08 10:16
http://en.wikipedia.org/wiki/Midwestern_United_States#Linguistic_characteristics

영어 가르쳐주시는 분도 "midwest" 발음을 선호한다는 말은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했듯이 미쉘 오바마처럼 시카고 네이티브는 그들만의 액센트가 또 있습니다. 아무리 표준어가 없다 하더라도 특정 지역에서 많이 쓰이는 액센트를 따라가려고 하겠죠?

위키에 잘 나와있네요.

The accent characteristic of most of the Midwest is considered by many to be "standard" American English, though the similar California English has in recent decades become the new standard. This accent is preferred by many national radio and television broadcasters.

Midwest를 보통 티비 아나운서들이 좋아하는데 요즘엔 워낙 캘리포니아가 큰 주다 보니까 그 쪽으로 표준이넘어가는 경향도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특정 한 도시가 모든 걸 압도하는 경우가 없으니 언어 역시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너굴; at 2009/06/10 12:03
이 규정을 만든 한글학자들이 '서울'을 사랑해서 '서울'로 정한 건 아닙니다.
위에서 '수아기 님'이 말씀하셨듯이 서울에는 서울 토박이도 계시겠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분들이 많습니다. 요즘 쓰는 '다문화 국가'라는 용어를 차용한다면, 서울은 '다방언 지역'이라는 말입니다.
서울말이란 이렇게 여러 지역의 우리말이 얼기 설기 섞이어,
한국어라고 일컬을만한 대표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으므로,
표준어로 지정되었습니다만...
굳이 말하자면 서울말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 말인지도 모릅니다(아메리카 원주민을 제외하고 '토종 미국인'이 존재하지 않듯 말이죠). ㅎㅎ
Commented by 양반 at 2009/06/11 11:30
영어는 지역에 따라 발음이 틀릴뿐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나요?
그에 반해 한국의 사투리는 발음뿐 아니라 전혀 다른 단어도 사용하고 있지 않나요?
Commented by 흑천황 at 2009/08/01 05:58
일본 같은 경우에도 나라에서 지정한 표준어는 없습니다.ㅎ

만약 역사가 어떻게 어떻게 흘러서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었다면

평양, 충청 전북일대, 경주등의 말들이 표준어가 됬을텐데 말입니다.ㅋㅋ

그러고보면

표준어 규정이라는 것도 꽤 웃깁니다.이것도 일제의 잔재일지 모르겠습니다.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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