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님이 내 옆자리?

인텔 개발자들이나 연구하시는 박사님들의 근무환경은 객관적으로 썩 좋지 않다. 파티션은 1.5미터 이상으로 제법 커서 완벽하게 가려주지만, 공간이 비좁아 닭장 분위기가 연출이 된다. 어두침침한 조명, 깔끔은 하지만 미국쇠고기 햄버거 말곤 먹을게 제대로 없는 식당도 그저 그렇다. 개발자 한 명당 방 하나씩 주는 Microsoft나 점심 공짜로 주는 구글에 비하면 하드웨어 회사인 이곳은 그렇게 뛰어난 근무환경은 당연히 아니다. 에어론 체어를 지급하는 NHN과도 거리가 멀다.

내 자리. 내가 가진 컴팩트 카메라가 광각으로 찍기 어려워 대충 찍었다. 보통 말단(?) 직원들에게 주어지는 공간은 저 정도이다. 물론 좀 오래 계신 분들이나 엄청 높은 펠로우 직급을 가진 박사님들은 내 공간의 3배 정도 되는 공간을 쓴다. 그러나 방을 따로 쓴다거나 그런 건 여기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내 옆자리에 나와 똑같은 큐비클에 좀 나이 든 아저씨께서 일하고 계신다.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2~3일 정도 보인다. 뭐하는 분인지 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Vice President 였다… 정확한 직급은 “Appointed Vice President” 인데 직역해서 부사장으로 보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100명 정도 되니 전무? 상무? 정도의 직급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어쨌거나 8만명 종업원 회사에 100여명 되는 직급이고 홈페이지에 프로필이 나올 정도니 높은 직급인 것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여기와서 우중충한 분위기에 좀 실망을 하였다. 산뜻한 소프트웨어 회사에 비하면 확실히 우울한 분위기다. 그런데 막상 다녀보니 무척 편하다. 일단 출퇴근 시간이 전혀 없다. 매니저에 따라 좀 다르긴 한데 적어도 우리 매니저는 전혀 돈 케어다. 어떤 박사님은 아기 봐야한다며 일주일에 이틀만 나온다. 아무도 뭐라 안 그런다. 그래서 지난 2주간 점심시간에 유로 2008보러 집에 가는 땡땡이를 치기도 했다 ㅋㅋ. 출근 시간도 전혀 없어서 10시 넘어 가도 아무런 말도 없다. 사실 출근 체크 조차 안 한다. 그런데 이런게 무섭다고 나중에 성과가 없을 때 내려질 철퇴가 두렵다. 그래서 요즘 두려워 하면서 놀고 있다.

이 나라는 나이 많으신 펠로우 박사님에게도 하이 제프! 로 이름을 부르는 나라. 매주 우리 그룹은 한 명씩 돌아가며 피자를 쏘는데 이 펠로우 박사님이 순번으로 왔을 때도 자신이 직접 피자 주문하고 7~8개 되는 피자를 직접 들고 오더라. 우리 같으면 나이 어린 애들이 알아서 할 것 같은데, 그 많은 피자 들고 와서 책상에다 펼치시는데도 젊은 것들은 옆에서 지들끼리 놀고 있더라. 내가 얼마나 불편하던지. 이게 좋은 건지 나쁜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직급과 나이에 상관없이 같은 큐비클에서 비슷하게 근무하고 호칭 또한 직급을 전혀 붙이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확실히 우리나라의 경직된 문화보다 좋다. 일단 “김전무님” 이라는 호칭으로 시작하면 직함에서 오는 압박으로 주눅이 든다. 그래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될런지 의문이다. 그렇게 말했다간 당장에 싸가지 없는 놈 소리 듣는다. 내가 그랬다. ㅋㅋ 딴지 걸면 계속 욕 먹는다.

 

지금 있는 곳이 당장 제품 개발을 하고 버그를 잡아야하는 개발 부서가 아니라서 널럴해 보일 수도 있다. 원래 미국에서 계속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별로 한 적은 없는데 짧은 시간이나마 있어보니 확실히 우리나라의 근무 분위기와는 너무나 다르다.

첫 번째 병특 회사는 ROTC 출신의 사장이 있던 매우 꼰대스러운 회사였다. 노는 토요일 오전 8시 30분까지 북한산으로 집합시켜 산행을 시키는 그런 분위기. 그래도 사장님이 나 보고 “좋지!” 그러면 “네, 맑은 공기 마시고 아주 좋습니다!” 라고 답변해야만 했던 그런 분위기. 맨날 일찍 퇴근한다고 9-to-6 라는 별명을 얻으며 언제나 눈총을 주던 그런 분위기.

개발자 한 명 당 방 하나씩 주고, 회사 내에서 킥보다 타고 다니고,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감옥같이 출퇴근 시간 꼭 지키게 하는데, 노는 휴일에도 회사에 저당잡히고, 가기 싫은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고, 억지로 술 받아 먹고 노래방가서 노래 불려야하고, 직장 상사 눈치봐서 퇴근도 일찍 못 하고. 이런 분위기가 없는 것이 좋다. 단언코 말하는데 연봉이나 근무 환경이나 개발자로서의 직업정 안정성이나 전문성 추구나 모든 면으로 봐서 한국보다 이 쌀나라는 프로그래머, 개발자, 그리고 엔지니어에게는 백만배 낫다.

 

과 동기 중에 4년만에 졸업하고 바로 병특 3년을 이어서 한 뒤 또 바로 S전자에 입사한 친구가 있다. 그래서 또래 나이에 비해 직급이 상당히 높다. 내가 그랬다. 너 곧 이사달겠구만 그랬더니.

이사하려면 술을 잘 먹어야 한다.

멀었다. ㅅㅅㅈㅈ에서 이사를 하려면 술을 잘 먹어야 한다는 소리가 21세기에도 나오는 것 보면 멀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바뀌겠지. 갑자기 술에 쉽게 안 취하게 하는 소련 KGB 알약을 사서 술 먹을 때 드시던 ㅅㅅㅈㅈ 부장님이 생각나는군. 졸라 슬픈 나라야. 뭐가 뻘소리가 너무 길어졌다.

by object | 2008/06/28 14:36 | 나머지 | 트랙백(1) | 핑백(1) | 덧글(28)
트랙백 주소 : http://minjang.egloos.com/tb/195334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metavital's .. at 2008/06/28 16:08

제목 : meta의 생각
"멀었다. ㅅㅅㅈㅈ에서 이사를 하려면 술을 잘 먹어야 한다는 소리가 21세기에도 나오는 것 보면 멀었다." - object...more

Linked at 미친병아리가 삐약삐약 : 20.. at 2008/06/30 15:36

... 기자포럼 발표 내용 "변화하는 패러다임, 360도 리더쉽 & 레벨5 리더쉽, 권위주의의 해체, 권한위임, 경청, 이해, 배려, 관계에 대한 요구" 라는 부분이 눈길을 끄는군.. 전무님이 내 옆자리? 이사 직급을 달려면 술을 잘 먹어야 한다.. 왜, 어떻게 마시느냐가 중요하겠지.. 하지만, ㅅㅅㅈㅈ에서는 대충 어떨 것이라는 것은 경험해보지 않아도 느낌이 온다.. 새벽 ... more

Commented by JOHN_DOE at 2008/06/28 14:52
할 일 없어도 일 만들어서 야근해서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줘야 하고 말이죠 ㅠ
Commented by object at 2008/06/29 16:14
우리나라는 일단 내가 당한 걸 너도 당해야 한다는 그런 심보가 강해서... 내가 늦게까지 있는데 너는 왜 가냐?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도 우리민족의 강력한 평등의식의 발현인지..
Commented by 하느니삽 at 2008/06/28 15:55
KGB 알약이라면 RU21이겠군요. 저도 한 때 좀 먹었는데 내성이 생겨서 나중에는 약이 안듣더군요. -_-
Commented by object at 2008/06/29 16:12
RU21 저도 하나 주는거 먹었는데 별반 효과를 못 느꼈었죠..
Commented by thebits at 2008/06/28 16:05
유로2008 보러 땡땡이 칠 수 있다니.. 우어어.. 최고 아닌가!!
Commented by object at 2008/06/29 16:11
땡땡이 치다가 나중에 짤릴까 걱정됨...
Commented by 오스카 at 2008/06/28 16:22
뭐, S 전자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ㅎㅎ
Commented by object at 2008/06/29 16:15
N 회사는 야근 좀 안 한다고 들었는데 팀마다 다른가 보군요. 게임쪽은 빡센가보네요.
Commented by eslife at 2008/06/28 16:45
아침 8시 출근에, 야근은 일주일 중 보통 4일 이상. 오늘 같은 토요일 도 출근하고 이제 왔어요 --;;
부럽네요.
Commented by object at 2008/06/29 16:15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있는 법입니다. 말이 안 통해서 그냥 괴롭죠.
Commented by 상희스타일 at 2008/06/28 17:37
ㅇㅈㅈㅈ ㅇㅆㅇㄱㅅ 에서는 파트마다는 다르겠지만 우리는 회식을 씨푸드 레스토랑에서 한 적 꽤 있어요. 아웃백에 가서 해본적도 있고. 이동네도 이제 슬슬 변하는 것 같아요. 가끔은 술먹고 노래방 가고 싶을때가 있을정도라니까요. ㅋ (어제 다녀왔음)
Commented by object at 2008/06/29 11:43
그래도 연구개발쪽으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죠. 저도 두 번째 병특 회사에서는 초반에 전부다 94~99 또래의 병특들만 모여있어서 참 좋았죠. 결국엔 젤 위에 있는 사람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엘지전자 ㅇㅆ연구소인 것 같은데 ㅇㅆ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ㅎㅎ
Commented by anon. at 2008/06/30 15:38
MC일겁니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 그냥 휴대폰사업부.

ㅇㅈㅈㅈ는 자기네 회사를 MC DA DD DM 일케 나눠놓더라구요.
휴대폰 냉장고 테레비 컴퓨터 일케 부르면 구리다고 생각하는지...?
Commented by tan at 2008/06/28 18:27
난 최근 1년간 야근 딱 한 번 했음. 그래도 눈치 안 줌. 회식은 영양보충 하는 아주 유익한 시간. 나는 정말 NHN 사랑한다. 물론 상사에 따라서 이 분위기는 바뀔 수 있는 무시무시한 랜덤의 세계! 이젠 안녕~
Commented at 2008/06/28 20:4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object at 2008/06/29 13:46
ㅅㅅㅈㅈ도 전무님에게 방 따로 주지 않더군요. 대신 무지 넓긴했지만 같은 공간 안에 있었습니다.
Commented by 칫솔 at 2008/06/28 22:24
인텔 코리아 파티션도 높던데, 그곳 파티션도 비슷하군요. ^^
(허나 한국은 퇴근은 몰라도 출근은 정해져있다는... -.ㅡㅋ)
Commented by object at 2008/06/29 13:48
파티션 높은 건 이 나라가 워낙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야근을 강제할 수 없는 이유도 일과 이후의 시간은 개인의 것이라고 존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는 그런거 없죠.
Commented by foog at 2008/06/29 00:16
재밌게(?) 읽었습니다. 한국의 직장문화야 안습이지요. 하지만 냉정한 성과주의의 미국도 안심할 처지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미국 직장생활을 안해봐서 잘은 모르겠지만요. :)
Commented by object at 2008/06/29 11:44
미국에선 해고가 밥먹듯이 나오죠. 그런데 우리와 좀 다른 점은 짤려도 재취업이 우리보다는 용이합니다. 물론 여기서도 대량해고 당하면 정말 암울하고 그러긴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런데 MS같은 곳은 완전 땡보직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대량 해고가 없었다죠. 물론 일 못하는 하위 몇 %는 짤립니다만.
Commented by BigTrain at 2008/06/29 16:06
혹시 배경화면을 interfacelift에서 따다 쓰시나요? 배경화면이 익숙한 사진이네요. ^^
Commented by object at 2008/06/29 16:11
그렇습니다. ㅎㅎ
Commented by 몽몽이 at 2008/06/29 19:59
ㅅㅅㅈㅈ 직원은 아니지만 일을 해 보니... 새벽 3시에 순찰을 도는 전무님이 계시더군화.
어느 부장님의 한탄 : 일요일에도 매일 출근을 안 하면 이사를 안 시켜주니...
저조차 새벽 3시까지 일한건 몇번 안되는데 저 전무님은 매주 한번은 도셨던듯.
Commented by icewall at 2008/06/30 00:45
인텔도 전에는 권위적인 문화를 가지고 방도 따로 쓰고 했다는데 회의때 자꾸 윗사람이 직급으로 의견묵살등등의 일들이 많아서 현재와 같은 문화를 가지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ㅎㅎ 출처는 살짝 불분명 하지만요 ㅋㅋ
Commented by 최재훈 at 2008/06/30 09:51
최근에 들어간 NHN 신입사원에게 물어보니까, 그 의자는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지급 안 된다던데요. 나머지 내용은 전부 동감합니다. 임원진 정도까지 승진하려면 '쇼'를 해야 한다고 얼마 전에도 조언을 들었습니다. 필요 없어도 야근하고, 술도 해야죠. 어차피 그렇게 안 하고 평범하게 살거라면 미국 생활을 하는 편이 나아보이기도 하네요.
Commented by 오스카 at 2008/07/02 14:29
NHN의 허먼 밀러 에어론 체어는 전 직원 지급입니다. 제가 있는 쪽의 신입/경력 새로 들어오신 분들도 다 지급 받았고요.
Commented by errai at 2008/06/30 16:01
주말밤에 불이 꺼져 있는 층을 검사하던 회장님이 떠오르는군요. 노는 토요일날 아침 산행은 그나마 행복했구요. 겨울에 야간 산행한 경험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ㅋㅋㅋ 물론 주말이었구요. ㅎㅎㅎ
출근과 퇴근에 제한없이 일한 결과물에 대해서만 따지는 문화는 합리적이다 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군요. 도대체 이나라는 비합리적인것이 왜이리 많을까요.
Commented by mina at 2009/11/25 13:35
잘 봤습니다. 재미있는 글 뒤에..참 씁쓸해지네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by 김민장 2008 이글루스 TOP 100
최근 등록된 덧글
개발자 입장에서의 수많은 ..
by Jiyoon at 02/04
저도 아들 돌잔치때 돌잡이 ..
by 박상욱 at 01/18
미국 대학원 원서 작성중에 p..
by 태클사이야 at 01/13
TO: 박PD 로그인 하지 않아..
by 박응용 at 01/10
http://gigglehd.com/zbx..
by dhunter at 12/28
우와.. 좋네요. 태반이 ..
by 윤광배 at 12/17
항상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
by y2k at 11/23
글이 좋아서 제 블로그에 담..
by 쏭섭 at 11/23
최근 등록된 트랙백
조엘 스폴스키의 강연 (Sta..
by 인덕원칸타타
[Redis] sds.c를 분..
by 조급하지말고 천천히
메뉴릿
이글루 파인더

website counter

Add to Google

rss

skin by 이글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