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 6개월 탄생론

예전 회사에서 일 할 때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프로그래머 뭐~ 6개월만 학원에서 공부하면 할 수 있는 거야.

그 자리에서 반박은 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프로그래머 자신들이 하고 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IMF 직후 급증한 청년 실업을 해소하고자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있는데, 바로 IT 인력 몇 만 명 양성 프로젝트였다. 정규 학과 과정이 아닌 속성 학원에서 6개월 정도 첨단 IT 기술을 교육 뒤, 산업 현장에 배치하여 IT 강국의 초석을 닦는다는 나름대로 원대한 계획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검색해보니 "청년실업해소"와 "IT 기술인력"은 같은 단락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제도가 성공적이었는가? 좀 싸가지 없고 심한 말일 수는 있겠지만, 급조된 저급 인력을 단순히 실업 해소 차원에서 시장에 마구 공급한 결과 밖에 낳지 않았는가? 그 결과 프로그래머는 대표적인 저임금 고강도 노동의 3D 업종이 되고 말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무분별한 인력 수급 정책으로 계속 남아서 고급 프로그래머로 커야 할 기존의 프로그래머들 마저 떠나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 IT 업계는 만성적인 고급 프로그래머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실업자 해소를 위해 대안으로 제시 되는 직업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일까? 결국 이러한 정부 정책과 그로 인해 개발자 자신 조차 "프로그래머는 그냥 대충 코딩만 할 줄 알면 돼"라는 인식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전락시키고 말았다.

다른 직업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잠깐 해보자. 의/치/한의사들 (통칭해서 의사로 표현) 돈 많이 번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의사가 되려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불쌍한 공대생들은 4학년 때 프로젝트 하느라 날밤을 까도 졸업 후 기다리는 것은 역시 이어지는 야근이다. 그러나 의대생들은 그 힘든 과정을 충분히 참을 수 있다 (공대가 아무리 빡세다고 해도 의대 본과 시험 일정을 보면 그냥 숙연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졸업 후, 월 검열 만원의 월급과 플래티넘 카드라는 분홍빛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여전히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의대 졸업생들이 의사 외에 다른 직업을 절대 찾지 않는데서 확인 할 수 있다). 아, 물론 의사들이 다른 직업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하는 것은 동의한다.

그러니까 결론은 엄청나게 높은 진입 장벽이 의사들에게는 있다. 그러니까 저렇게 모여서 데모도 할 수 있는 파워가 생긴다. 엔지니어라는 직업에게 이러한 수준의 장벽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반도체 설계 기술자가 되려면 적어도 대학에서 해당 전공은 해야 한다. 학원에서 몇 달 배운다고 회로를 다루는 엔지니어가 되지는 않는다. 엔지니어 중에서도 가장 진입 장벽이 낮은 직업이 이제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물론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것이 모두 탄탄한 전공 지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프로그래밍 지식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도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초점을 너무 잘못 맞추었다. 너무 낮은 수준의 IT 기술만 잔뜩 벌려 놓았다. 고급 수준의 컴퓨터 지식이 있어야 VMware나 구글 검색엔진 같은 단순 코딩만으로는 불가능한 신기술들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신기술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돈이 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면 기업은 더 과감한 투자를 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직종의 평균 임금은 높아지고 똑똑한 친구들도 더 몰려온다. 이것을 발판으로 다시 새로운 전산 기술이 태어나는 선순환을 반복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이 중에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프로그래밍 자체는 쉬워야 한다. 프로그래밍을 하는데 어설픈 진입 장벽은 불필요하다. 프로그래밍이라는 건 자고로 Emacs와 gcc로 코딩해야 하고 일단 어셈부터 시작하자라고 말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 초등학생도 클릭 한두 번으로 "Hello, World!" 를 띄우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프로그래밍 자체가 쉬운 것과 프로그래머의 위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프로그래머의 진입 장벽을 이런 것으로 쌓아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프로그래머'는 코딩 실력뿐만 아닌 다른 능력으로 되기가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기초적인 전산 지식은 물론이고 컴퓨터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다양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해결능력을 갖춰야 한다. 뛰어난 프로그래머는 단순히 프로그래밍 언어만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시스템에 대한 통찰력과 소프트웨어 설계 능력이 그것을 가늠한다.

빈말이라도, 농담이라도, 우리 개발자 스스로 프로그래머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말은 하지 말자. 프로그래머가 되기는 정말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룩해야 그 만한 보상도 따르고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다. 아무리 청운의 꿈을 품고 개발자로 와봤자, 너도 나도 "이거 뭐 아무나 하는 일인데" 라는 말을 하면 누가 여기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할 것인가? 그러니 개발자라는 직업은 젊었을 때 잠깐 한다는 생각이 만연해있는 것이다. 프로그래머 자신들이 고급 프로그래머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들지 않고 있다.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부단히 자기 계발해야 한다. 그래서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의 진입 장벽을 높이자.

… 써 놓고 보니 저부터 반성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드는군요. 아아.

그러나 이제는 의사를 해도 월급만으로는 쉽게 살 수 없을 만큼 치솟은 아파트 가격. 결론은 로또.

ps. 글을 써 놓고 보니 http://www.zdnet.co.kr/itbiz/column/anchor/sypark/0,39030431,10036384,00.htm 이런 글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무려 6년이나 된 글이군요. 엄청난 댓글을 대충 읽어보니 글 올리는 것을 취소할까 생각도 하였지만 제 글의 요지는 저 글과는 많이 다릅니다. 전공자와 비 전공자를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처음부터 컴퓨터학과에 입학한 것은 아니니 비전공자(?)로 컴퓨터를 시작 했습니다. 제발 6개월 만에 컴퓨터 전문가가 될 수 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것이죠. 꼭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졸업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6개월이 아닌 오랜 시간을 통해 자신만의 기술을 만들어 진입 장벽을 쌓자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by object | 2007/03/29 15:55 | 컴퓨터 | 트랙백(1)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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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Analogue Story at 2007/03/29 17:53

제목 : 개발자 라는것
나는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대체로 영상관련 개발자 정도라고 말한다. 좀더 세부적으로 물으면 Computer Vision, 최근들어 2nd Job으로 Codec 관련 일을 하고 있다는 정도. 실질적인 개발을 하는 부분도 있지만 주로 라이브러리를 제공하는 일을 한다. 제공된 라이브러리를 보면 Motion Tracking 라이브러리나, PC용 AV Codec 정도. UI나 단순한 코딩을 주로 하지는 않는다. ......more

Commented by 삐루 at 2007/03/29 16:08
프로그래머들의 대부분은 로또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ㅎㅎ
Commented by Sikuru at 2007/03/29 16:28
아하하ㅠㅠ 저도 뭔가 많이 와닿는 말씀이네요.
Commented by 학주니 at 2007/03/29 16:31
공감이 갑니다. 저도 프로그래머지만 요즘 정말 심한말로 널린게 프로그래머라는 얘기를 합니다.
물론 학원같은데서 6개월 숙성코스 밟고 나온 병아리들 말입니다.
저 역시 학원을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학교과정에서 배우지 못한 경험을 얻기 위함이었지요(물론 스킬 획득도 있었지만 말이죠).
요즘의 프로그래머는 정말로 개념없이 그냥 코딩만 할 줄 아는 그러한 프로그래머들만 널린듯 합니다. -.-;
Commented by Gerald at 2007/03/29 16:34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참고로 cs 관련학과도..너무 실무적인것에 강조점을 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좀더 연구자적 자세로 일을 하도록 저부터도 노력해야 겠습니다..
Commented by IRIS at 2007/03/29 17:44
게다가 요즘은 단기양성해외수출코스도 있어;;;; O-<-<

Commented by A2 at 2007/03/29 18:18
최근 어떤 사람이 VB가 대세며 웹프로그래밍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거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야근은 기본 야근수당 없는건 자연스러운거라고 생각하더군요.
거기다가 전공자보다 비전공자가 시키는대로 일을 잘한다고 합니다.
직접 들은게 아니지만 어찌나 황당하던지;;

몇년을 공부해도 그 깊이에 끝이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개발자를 우습게 보다니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소리 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ㅠㅠ
Commented by object at 2007/03/30 06:51
한 때,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것이 몇 개월간 뚝딱 코딩 기술만 배우면 되는 것으로 인식이 되었었죠. ps에 링크되어있는 글이 쓰여졌던 2001년만 해도 그러한 인식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IT 업계에서도 이제 거품은 빠질 때로 빠졌고 너도나도 비전공자들이 몰려드는 그런 분야도 더 이상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정부의 정책 하나 덕에 여전히 개발자의 처우 및 전체적인 인력의 질은 좀 처럼 개선이 되지 않습니다.
Commented by tan at 2007/03/30 14:42
분홍빛 미래 ->장미빛 미래
Commented by onion at 2007/03/30 16:37
dotcom 붐이 사라지고 나서도 몇 년 동안 IT 는 쉽게 빨리 돈 벌수 있는 직종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아요. 요즘에야 전 세계적으로 거품이 가라앉고 있지만 dotcom 시대, 실력 검증도 불가능하게 정신없이 변하는 상태에서 IT/nonIT 사람들이 엉망으로 뭉쳐있어서 더 어지러웠던 것 같습니다.
의사나 변호사들처럼 좀 집단적인 자부심과 체계적인 양성교육이 있으면 확실히 달라지겠죠 :) 어떻게 프로그래머가 3D 직종입니까 ㅜㅜ
Commented by object at 2007/03/31 09:11
3D 업종... 흠. 반은 우스개 소리고 반은 현실입니다. 외국에서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밥 먹듯한 야근과 박봉에 언제 짤릴지 모르는 불안감에... 3D가 갖춰야할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죠. 그나마 무언가를 만든다는 창조 정신-_- 하나로 버티는데 그 대우는 여전히 박봉. 개발자 아무리 해봤자 금융쪽 연봉 반도 안 되는 것이 현실이죠.
Commented by codewiz at 2007/04/16 18:00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공감되네요.
Commented by 혈견화 at 2007/05/12 20:15
제가 computer programming -> Busines information system 으로 전공을 바꾼 이유.
Commented by 게드 at 2009/03/09 20:22
그래서 진입장벽이 높은 프로그램 파트로 왔습니다 ... 하지만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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